역사이야기/한국사

역사이야기_임진왜란 일본의 점령지, 수군의 방어

넥벤져스1984 2024. 10. 17. 22:47
반응형

① 평양성 함락

 

6월 8일 임진왜란 발발 후 약 40일이 지난 시점에서

제1 군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안남도 대동강변에 도착했다.

1, 2, 3군에 제비를 뽑고, 1군은 선조를 추격, 2 군인 가토는 함경도 진출

3군은 나뉘어져 시마지는 강원도로, 오토모는 황해도를 점렴중이었고

3군 사령관인 구로다나가마사는 1군과 함께했다.

1군과 3군은 평양성 진출까지 큰 전투 손실은 없었지만,

부산진성, 동래성, 상주, 탄금대, 한양, 개성에서 전투를 치렀고

이때 어느 정도 비전투 손실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성은 수도 한양에 이은 조선시대에 두번째 큰 도성이었다.

 

평양성 전투에서는 윤두수, 유성룡, 김명원, 이원익 등이 평양을 지키려 했다.

대동강은 임진강보다 더 큰 지류이며, 평양성 역시 당시 조선의 2번째 도성으로

평양 사수를 위하여, 평안도에 있는 수령들은 병력을 보냈다.

또한 승려들도 합류했으며, 현자총통을 포함한 조선의 무기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여기서 또 선제공격이라는 실수를 저지른다.

화포사격으로 당황한 일본군을 또다시 추격하기에 이른다.

물론 조선의 육군은 계속 모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섬멸하고

수도 한양을 수복하길 원했겠지만, 일본군의 유인책에 또 다시 패배하고,

수심이 얕은 왕성탄을 건너는 모습을 일본군에게 노출하면서

일본군이 왕성탄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② 일본군의 조선 지역 점령지

일본군의 진출과 / 실제 일본군의 정령지역

 

일본군이 수도 한양에 이어 개성, 평양까지 함락하여

1592년 6월은 일본이 조선의 영지를 가장 넓게 점령한 시기였다.

이 당시 제2군 가토는 함경도로 진출하였고, 3군 이하 부대는 조선의 영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래서 흔히 착각하는 게 전라도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조선의 영지를 점령했다고

생각하는데 일본군은 당시 17만 명 정도가 조선에 상륙했는데

해당병력으로 한반도의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 병력으로는 보급의 유지력이 더 좋은 현시대에서 전선 유지가 불가능하다.

 

또한 행군을 진행하며, 보급로에 대한 지속 반복적인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발생하는 손실 외에도 비전투 손실이 누적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시대는 의학적으로도 지금보다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식수를 확보했더라도, 바뀐 식수로 인해서 많은 일본군들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은 아직 진출하지 못했으며, 

낙동강 서쪽의 경상우도 지역을 점령하지 못하였다.

일본군은 한양 진출이 최우선적 목표였기 때문에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30 ~ 40리 간격으로 방책을 쌓어 주여 방어거점을 만들고

보급품을 부산으로부터 한양으로 이송하고 있었다.

현대전에서 우리 국군도 남한 전 지역에 보급로 유지하는데

20만 이상의 병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일본군은 나고야에 대기 중인 병력까지 28만이며, 조선에 상륙병력은 17.8만 수준이라

주요 거점을 확보하며, 평양까지 진출했을 뿐 한반도를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한반도는 특성상 산지가 많기 때문에 해당 지역으로 섣부른 진출을 못했을 터라

태백, 소백산맥을 넘어서는 곳에는 점령하지 못했다.

 

실제로 6.25 전쟁 당시에도 산지지역 마을에는 북한군이 침투하지 못하고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전쟁을 인지하지 못했던 곳도 있었기도 하다.

하지만 부산, 대구, 상주, 수원, 한양, 개성, 평양 등 조선의 주요 도시는 점령되었고

일본군은 전선을 유지하는데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③ 조선 수군의 활약

 

조선은 육군을 제외한 수군도 제승방략 체제로 각 지역에서 병력을 소집하고 있었다.

경상도의 수군은 전선을 자침 하며 자멸한 것과는 달리

전라도의 수군은 이제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전라 좌수영의 민족의 영웅 이순신은 판옥선 24척 포함 약 7,000명

전라 우수영의 이억기 장군은 판옥선 25척 포함 약 6,800명을 지휘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우수사 이억기제독과 조선의 군함 판옥선

 

전라도 수군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라도 지역 방어를 위해 경상도 우너정을 자제하였으나

한성이 함락된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일본군이 있는 경상도 바다로 진출했다.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에 진출한 날은 한양이 함락된 다음날 5월 4일이다.

전라도 수군의 첫 전투는 거제도 옥포에서 진행되었고,

경상 우수사 원균은 판옥선 2척 포함 600여 명을 수습하여 참전한다.

이 시기에는 전라 우수영은 합류하지 못하였고,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이 출전했다.

 

일본군의 전투함이 이때부터 이순신의 함대로 인하여 손실되는데

병력의 손실은 해상전 특성상 정확하게 확인은 불가하나,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연달아 일본 수군을 격파하며, 약 40척을 격파한다.

물론 40여 척을 격파하여, 탑승병력 고려 시 6,000여 명의 일본군을 수장했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일본군의 선박에 병력을 채워서 탑승시키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일본군의 선박은 약 800 ~ 1200척으로 추산되는데 이중 전투선보다는

대한해협을 건너기 위한 선박이 상당수 포함 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어

조선 전라좌수영의 수군은 적지 않은 전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일본은 수군이 강하고 육군이 강할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일본은 센코쿠 시대에도 대부분의 전투가 수군이 아닌 육군에 의해 진행되어

실제로는 수군보다는 육군이 더 강력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전라도 수군은 전쟁을 착실하게 준비한 덕분에

일본군의 수군은 조선의 수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2차 출전은 평양성이 함락될 때쯤 시작되었는데, 사천, 당포, 진해, 당항포, 율포에서 전투를 치렀다.

2차 출전에서는 1차보다 더 많은 70여 척을 격파했다.

하지만 조선의 전함인 판옥선은 한 척도 잃지 않았으며,

한반도 민족의 특징은 100:1 이상의 교환비를 거두고 있었다.

 

1~2차 수군의 출전으로 약 110척 이상의 함선이 격파되고

1만여 명의 사상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군이 격파됨으로 인해서 비전투함인 수송선단 만으로 부산에 추가 상륙을 도모하는 것은

지금의 해군 전력으로도 어려운 작전이기 때문에 나고야의 후속 병력은

조선에 상륙하지 못하고, 나고야에 대기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따라 평양, 함경도로 진출한 일본군 선봉대에 대한 보급에 차질이 생겨

일본군의 전방 진출은 더디게 되었고, 전투력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율포해전과 사천해전 (조선 수군의 1, 2차 출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