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한국사

역사이야기_임진왜란 조선의 반격

by 넥벤져스1984 2024. 10. 16.
반응형

① 탄금대 패배 이후 수도 한양점령, 선조의 몽진

탄금대에서 조선이 패하자, 마땅한 호위병력도 없는 선조는 몽진을 떠난다.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은 지방 군을 포함하여 중앙군까지 모두 잃어버렸다.

선조는 왕의 호위 병력까지 신립에게 맡겼던 터라 수도 한양을 방위할 병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조선 조정은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개전 이후 한 달이 지난 시점에도 왜군의 숫자나, 얼마나 강한지에 대한 지식이 없고

어떻게 병력을 징발하여, 적군에게 대항할 것 인지에 대한 대안이 없었다.

우선 선조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전권을 부여한 후 평양으로 떠난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한양으로 북상하며, 전략적 오판을 저지른다.

부산진성 전투 이후 조선군은 군대를 보내 저항했기 때문에

수도 한양에는 대규모 병력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1,2,3군이 모두 집결했다.

그리고 수도 한양을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거라 생각하고

한양으로 진격했으나, 수도 한양에 있어야 할 선조는 없었고, 병력도 없었다.

조선의 농노들은 전리품으로 따라올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끝까지 저항했다.

 

수도 한양을 점령한 이후에도 조선의 국왕을 사로잡지도 못하고

영토를 점량하여 재보급을 진행, 명으로 진격하겠다는 전략은 실패했다.

 

② 조선군의 최초의 승리 해유령 전투

 

개전 후 한달 후인 5월 16일 조선은 일본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기록한다.

일본군과의 전투를 거듭한 결과, 조선군에는 전투 경험치가 축척되고 있었고

끊임없이 중국과 대결하던, 민족적 특성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도원수 김명원은 병력도 없었을뿐더러 신립도 막지 못한 일본군을 상대로

한강 방어선 유지를 실패한 채, 후퇴했다.

하지만 부원수 신각은 양주의 해유령에 진을 치고, 가토기요마사(가등청정)의 선발대 70명을 도륙했다.

 

개경까지 후퇴한 도원수 김명원은 본인의 문책을 두려워하여

신각의 본인 멋대로 행동하여 패배하였다는 거짓 장계를 올렸고,

선조는 선전관을 파견하여 신각의 목을 치라 명령했다.

하지만 이후 신각으로 부터 승전장계가 올라와 재차 선전관을 보냈으나,

이미 신각은 5월 18일 선전관에게 목이 베여 처형된 이후였다.

 

첫 승리를 기록하였으나, 조선의 방어체계는 물론 신상필벌체계 등 

모든 체게계 무너졌다, 조정으로 올라오는 장계는 어느 게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이에 따라 조직정인 전쟁 수행 능력이 없었다.

최초의 승전보를 기록한 신각 장군은 승전 후 이틀뒤 적의 칼이 아닌

아군의 거짓 장계로 인하여 처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의 승리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보인다.

 

③ 전쟁 지휘관의 부재, 공명심에 의한 임진강 전투

 

신각 장군이 처형된 5월 18일 도원수 김명원은 임진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황해도 지역을 포함하여 재차 병력을 소집하여 13,000명을 

조선은 방어 거점이 많은 편이었다, 한강, 임진강 등 강이 지금 현대 군인도 도강하기에

넓은 강이기 때문에 배가 준비되지 않으면 공격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고

실제로 가토 기요마사도 임진강에 조선군이 주둔해 있자

섣불리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선박을 구하더라도, 강건너에 조선군의 수가 많고

동시에 도강을 하지 못하기에, 지금까지 승승장구한 일본군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지금과 유량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도강 할 수 있는 수준의 하천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명원은 큰 실수를 저지른다.

임진강 방어선에서 방어만 진행하더라도, 후방교란 등의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공격을 감행하고자 했다. 대치가 길어지자 일본군은 철수를 시작했고

조선군은 임진강을 건너 일본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군의 유인책이었으며, 매복된 일본군에 의해서 조선군은 또 1만 명이 사라진다

이미 전라도를 비롯하여 제승방략체제에 의해서 병력이 모이고 있었고

임진강 방어선만 잘 유지했었더라도, 평양성까지 단기간에 점령되진 않았을 테지만

김명원은 수도 한양을 수복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 같다.

이를 볼 때 아직도 조선은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의 규모에 대해서 파악이 안 된 것 같다.

전쟁에서 첩보의 유무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확인할 전투가 임진강 전투였다.

 

임진강전투에서 설사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하더라도,

일본군의 후속병력이 계속 진출하는 상황에서 공세를 취할 수 없었을 텐데

일본군에 대한 정보 부재가 최악의 판단을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④ 마지막 불씨 용인전투

 

선조의 피난 속에 충청도와 전라도는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또한 병력을 모아 수도 한양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군세는 8만(추정) 하지만 전부 전투병력을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8만의 군세를 먹고, 주둔지를 찾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벅찬 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가 5만 이상의 군세를 동원한 게 고려의 요동정벌이다.

고려는 국운을 걸고 병력을 모아서 요동 정벌을 떠날 때 5만의 병력이었다.

용인전투에서 8만의 조선군은 전투병력이 아닌 단순히 숫자를 모은 것으로 보이고

이만한 군대를 조직했다는 점은 이 시기부터 일본군의 숫자가 적지 안 다라는 걸 확인한 것 같다.

한양으로 진격하던 도중 수원에서 일본군과 첫 조우했다.

후방의 병력을 예상하지 못한 일본군은 후퇴하여 용인에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합류한다.

 

아침을 먹던 조선군은 1600명의 일본군에게 5만의 병력이 도륙된다.

하지만 일본군의 숫자가 1600명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력이 도륙된 게 아닌 것 같고

대부분 흩어져서 본인의 살길을 찾아 떠나게 되었고,

후일 의병이나, 관군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용인에서 패배하여 근왕군이 흩어짐을 통해서, 

일본군의 보급로 압박에도 실패, 수도 한양 수복에도 실패하여,

일본의 1군 고니시, 2군 가토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용인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일본군은 진격을 멈추고 전선을 뒤로 물렀을 텐데

용인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하여, 전선을 다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명성이 높지 않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