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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한국사

역사이야기_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대응

by 넥벤져스1984 2024.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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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엄청난 진격 전의 뒷면에는

조선의 무기력한 대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포스팅에서는 전체적인 우리나라의 임진왜란에서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

전체적은 전쟁 자체에서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봤고

이번에는 왜란 초기에 조선이 어떻게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보려고 한다.

 

(▼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무기력한 대응 포스팅)

https://sunrisepark1984.tistory.com/219

 

역사이야기_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무력한 대응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두 달 만에 평양성까지 함락됐다. 물론 일본군의 전략이 속전속공이기도 했고, 당시 조선에 대해서 파악하길 상비군이 부족하여 초기에 수도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의 왕

sunrisepark1984.tistory.com

 

① 전쟁 초기 조선 조정의 대응

부산에서 밀양까지 거리는 약 50km고 지형을 보면 알수 있지만 산악지영보다는 김해 평야지역으로 평야지대이다. / 왜란초기 일본군 진격

 

부산성 전투와, 동래성 전투가 이틀 만에 함락으로 결과가 전해졌을 때쯤

3일 뒤인 밀양전투 (양산목사 박진 지휘 300명 / 4월 18일)

밀양전투 하루 뒤인 언양전투 (소수의 군민 / 4월 19일 / 2군 가토 기요마사)

언양전투 하루 뒤인 김해전투 (김해부사 서예원 1,000명 / 4월 20일 3군 구로다 나가마사)

1군의 밀양, 2군의 언양, 3군의 김해 위치적으로 확인하면 3군의 김해는 1, 2군은 그냥 돌파했다.

 

위치로 보면 알 수 있지만 1군이 부산진성, 동래성 전투 이후 진행된

밀양 전투는 3군이 치른 김해전투보다 북쪽에서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침략 시 굉장히 치밀하게, 선봉부대인 1, 2, 3군이 공략할 곳을 정해두었고

최대한 빠르게 수도 한양을 진격하기 위한 진격 전을 진행했다.

 

하지만 조선은 부산진성, 동래성 전투 이후 3일이 지난 시점에도

경상남도 지역에서 병력의 모집다운 병력을 모집하지 못했다.

김해부사 서예원은 추후에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하지만

황진장군과 같은 군민에게 신뢰받는 지휘관이 아니었다.

 

물론 일본의 기습적인 침략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경상 좌우수사, 경상 좌우병사 모두 대응을 하지 못했다.

물론 대군의 침략으로 병력열세, 무기열세, 전투경험의 부족으로 일방적으로 밀렸고

용감하게 맞서 싸운 장군들과 병사들도 많았지만 

지금 기준으로 군단장, 함대 사령관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도망쳤다

근데 후일을 도모한 장군이 없다.

 

우리나라의 임진왜란 초기 방어체계는 제승방략이었기 때문에

제승방략 체제에 의거하여 경상도 지역에 순변사 이일을 파견했고,

충청도 지역에는 도순변사 신립으로 하여금 병력을 모아 방어하게 하였다.

 

② 병력도 모집되지 않고 훈련부족을 드러낸 상주전투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 한국군의 복장, 무기체계

 

제승방략 방어전략이 가동되어, 경상도 지역에는 각 고을에 전달되어

경상도의 병력이 대구로 집결되도록 진행되었다.

병력은 현지에서 동원되고, 지휘 병력은 이일이 한양에서 300명을 모아 내려가자 했지만

군관을 모으지 못하여, 대구로 내려가지 못했다.

이일은 사나흘 지체하여 60여 명의 군관을 모집하고, 병력을 4,000명 모집하여

대구로 내려갔지만 대구에 집결해 있던 병력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진다.

병력은 모였지만 이를 통솔할 지휘관들이 다 흩어져 버렸다.

 

순변사 이일이 문경을 지나 상주에 도착했을 때는 대구에 병력이 흩어진 이후였다.

상주에 도착하여 상주에서 800명을 모집했으나, 이는 군인이 아닌 일반 농민이었다.

이일은 수도 한영에서 편성한 군과 함께 군사훈련을 시작하였으나,

일본군 선봉대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정찰을 통해 상황파악을 하고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수도 한양에서 162km / 밀양에서 상주는 115km 대응이 느려도 너무 느리다.

 

4월 25일 (밀양전투 이후 7일 뒤) 일본군은 하루 20km씩 진군하였지만

조선의 순변사 이일은 하루에 30km씩 남하하여 상주에 도착했다.

침략하는 군과 빠르게 방어전선으로 이동하는 군대의 진격속도에서, 대응이 늦었다.

모든 것을 파악한 일본군에 경상도에서 모인 조선군은 완전히 포위 섬멸되었다.

4월 26일 고니시 군은 문경으로 진출하고 후속부대의 상륙이 진행되어

경상도의 대부분의 고을은 무너졌고, 군졸들은 모두 흩어졌다.

 

③ 임진왜란 최대의 패착 탄금대 전투

초기 유럽의 동아시아 지도 (일본은 구체적으로 작성), 조선은 간략하다. / 탄금대에서의 대패를 당한 조선군

 

충주까지 진출한 일본군의 선봉대 소서행장의 부대는

상주전투 이후 3일 뒤 충주 탄금대에서 조선의 군대와 또 전투를 치른다.

일본군은 부산진성, 동래성 전투 이후 전투다운 전투를 진행한 적이 없다.

경상도는 말 그대로 유린되고 돌파당했다.

 

당시 여진과의 전투에서 큰 활약한 신립장군에서 조선군은 큰 기대를 걸었다.

당시 임금 선조도 신립에게 어도를 하사하고, 군통수권을 하사했다.

호위에 필요한 최소의 군사도 남기지 않은 채 조선 중앙군이 모두 동원되었다.

 

탄금대 전투의 조선군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 중앙군 기마명 8,000명

충청도의 제승방략체제에 의해 소집된 12,000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충청도의 병력은 훈련이 안된 농민병이었고, 신립은 중앙군을 위주로 전략을 펼친다.

그도 그럴 것이 여진족 토벌 시 8,000명의 기병의 전쟁을 치른 적이 없기 때문에

8,000의 병력으로 충분히 꺾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을 것 같다.

또한 배수진을 친 이유는 전쟁경험이 없는 조선군의 퇴로를 막으려 했고,

기병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남한강의 넓은 들판을 전장으로 선택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고려 요소가 있다.

조령에 진을 치지 않은 이유, 후퇴하여 한강 방어선을 펼치지 않은 이유

간단하게 생각하면 조선군은 급하게 편성되어 치중대의 편성이 없었다.

물론 일본도 후방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겠지만, 조선군은 상비군 편성이 없어서

보급부대가 전무했을 것이다. 조령에 험준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방어하면 좋겠지만

보급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서, 보급이 되지 않아 괴멸했을 수도 있다.

전쟁을 치르는데 보급의 기능은 엄청 중요하다.

물론 무기의 보급도 중요하지만, 식량이 이틀 끊기면 전투력을 상실하고,

식수는 하루 끊기면 그 병력은 전투력을 상실한다.

당시 급하게 편성된 조선군에 조령에서 요격 방어를 할 정도의 보급부대는 없었을 것 같다.

보급부대가 없는 신립은 장기전이 어렵다 판단했고,

본인이 일본군을 섬멸하여 공을 세우고 싶어 하는 공명심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의 중앙군은 용맹하게 싸웠지만, 완전한 패배로 전투는 끝났다.

물론 신립이 일본군의 제1 군인 고니시 군을 탄금대에서 격파했더라도

이어 밀려들어오는 2군 가토, 3군 구로다 군을 막아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신립장군은 왜란 초기 대응 실패라는 오명을 홀로 가져간 것 같다.

조령에서 신립이 진을 치고 막았더라도, 다른 경로로 침입한 2, 3군에 의해서 포위섬멸되었을 것이고

일본 전국시대에서 산전수전 겪은 일본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의 대응은 무기력했다.

전선의 최전방을 지켜야 하는 지휘관들은 전선을 이탈하고 퇴각했다.

이 가운데 무기와 군사물자들을 자침, 불태웠다.

그리고 초기일본의 난폭한 군사적 행동들은 경상도 군민들을 흩어지게 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최대 패착은 방심이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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