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기 조선, 명나라 침략 전략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명나라 침략전략의 문제점을 알아보면
첫째, 일본군은 한양에 진격하여, 조선국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으려고 했다.
일본의 경우에 영주를 사로잡으면 전투가 종료되기 때문에
본인들의 사고 방식으로 조선의 왕을 사로잡고, 조선군이 복종하면,
주민들이 일본군에게 복종하고, 충성을 맹약할 줄 알고, 한양 공략에 약 5만 명을 동원했다.
하지만 조선의 임금 선조는 백성을 두고 몽진을 떠났으며,
조선 백성들은 자신들을 두고 떠난 임금을 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항쟁을 진행했다.
그래서 두번째 문제는 히데요시는 한양 점령 이후 점령군을 나눠 8도를 점령하려 했다.
조선 8도를 점령하여, 병력과 병량을 충원하여 평양성에 집결하여
조선을 넘어 명나라로 침략하려고 했다.
하지만 임금이 도망갔음에도 조선군들은 끊임없이 의병을 조직하며
일본군의 후방에서 일본군이 전방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항쟁을 지속했다.


세 번째는 히데요시는 1군에서 9군까지 15만 8천 명으로 조선을 점령하고
나고야에 후속병력을 선박을 이용하여 남해와 서해를 돌아 명나라로 침공하려고 했다.
일본은 왜구들을 통해 명나라의 산둥반도 등을 지속적으로 약탈했기 때문에
해당 수로로 이동이 가능했고, 수륙 병행 작전을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선봉대들은 의병들에 의해 타격을 입고 있었고,
보급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남해에서는 조선수군(이순신)에게 타격을 입어
남해를 통한 진출 자제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
② 전쟁초기 조선 수군의 대응
한국의 역사 기록에는 일본군 선봉대가 1군 18,700명, 병선 700척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병선 700척은 1군의 선박이 아닌 사실상 일본군의 전체 수군의 숫자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선 1척당 200명 정도 탑승이 가능하고, 1군이 모두 100여 척에 탑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먼저 왜군의 선박을 맞이해야 하는 조선의 수군은 경상 좌수영 박홍, 경상 우수영 원균
해당 군영에는 판옥석 88척, 군사 2만명이 있었다.
물론 당시 조선은 상비군 체제가 아니었고, 관포별로 판옥선이 흩어져 있어
해당 세력을 모으기는 힘들었겠지만, 전쟁 조짐이 있었고,
전라 좌우수영은 병력을 잘 모아서 방어선을 구축했기 때문에
경상 좌우수영의 초기 대응은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당시 조선군에서도 일본군은 해군에 강하고, 육군이 약하여
해상전으로는 승리할 수 없고, 육상전에서 기마병으로 승리해야 한다가 바탕이었고
기존 왜구의 침략에서도 그렇게 진행했기 때문에 이러한 전략전술로 준비했을 것이다.
전쟁 초기 경상 좌우수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병력을 해산하고, 판옥선, 협선을 스스로 자침 하며 해산했다.
③ 일본군의 노련함을 보여준 부산성, 동래성 전투
임진왜란의 개전을 알리는 조선군과 일본(왜)군의 첫 전투는 부산성 전투였다.
부산이 지금은 대한민국의 2대 도시이지만, 조선시대의 부산은 동래부로
인구는 세종시대 약 7,000명 수준으로, 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조선은 상업이 발달한 국가도 아니었고, 조선시대에는 상업도 일본이 아닌 명과의 교역을 진행하여
부산보다 평안도지역의 평양이나 의주가 더 큰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를 800만으로 추정 시 약 1%의 인구가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현 기준으로는 약 40만 수준으로 포항보다 작은 규모이다.


당시 부산성의 조선군은 백성을 포함하여 약 2,000명 수준이었고
병사는 800-1,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하지만 일본의 선봉대 제1군 고니시 군은 18,700명의 정예병이었고
위의 사진처럼 낮은 성곽에서 숫적 열세를 딛고, 조총을 사용하는 일본군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숫적 우위를 점하고 무차별적 공격이 아닌
조총을 쏘와 우월한 화력 시위를 하여, 조선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실질적으로는 성벽이 낮은 곳을 통해 성안으로 들이닥쳐 전투 결과를 극대화시키는
당시 일본군의 특유의 전법을 구사했다.
결과는 2시간 동안 정발장군은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거이 대부분이 전사했다.
고니시 군은 부산진성 함락 이후 동래성전투를 준비한다.
하지만 제승방략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조선군은
일본군의 침략을 알면서도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또한 동래부의 전 인력을 끌어모은다 하더라도, 수군이 흩어진 상황에서
3,500명이라는 병력으로 수군이 합세한 일본군 선봉대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3,500명 중에서도 실제 군은 1,000여 명 남짓에 주변 백성 2,500명 정도로 추정된다.
부산진성 공격 시 대부분의 일본군 사상자가 화살에 의해서 발생했기 때문에
동래성 전투에서는 일본군은 장수복을 입힌 허수아비도 준비했다.
조선도 나름대로 성에 통나무 방어책으로 조총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부산진성과 동일하게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동문을 집중 공격하여 성안드로 진입했다.

성안으로 일본군이 진입하자, 조선군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고
개인 전투력에서 일본의 무사집단을 조선의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송상헌 부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병력들이 2시간 만에 전사한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이틀 만에 함락되었지만, 조선군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었다.
적군이 압도적인 숫자로 공격을 오더라도, 조선군은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였으며
조선군의 정보네트워크는 긴밀하여, 해당 전보가 조선 8도로 전해짐을 통해 준비할 수 있었다.
정보전을 잘 진행하는 면도 있었지만, 사전에 공격기미가 있었음에도
초기 대응에 실패한 조선은 추후에 국토 대부분을 유린당하게 된다.
'역사이야기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이야기_임진왜란 조선의 반격 (12) | 2024.10.16 |
---|---|
역사이야기_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대응 (15) | 2024.10.14 |
역사이야기_임진왜란 일본군_제 3군 (구로다 나가마사) (37) | 2024.10.09 |
역사이야기_임진왜란 일본군_제 2군(가토 기요마사) (72) | 2024.10.07 |
역사이야기_임진왜란 일본군_제 1군(고니시 유키나가) (44) | 2024.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