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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한국사

역사이야기_임진왜란 조선 백성의 자발적 군대 조직(의병)

by 넥벤져스1984 2024.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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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조선의 의병

 

일본군이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양산, 밀양, 언양, 김해, 경주 등 경상도 지역으로

진출을 확대하고 있을 무렵 의령에서 곽재우가 4월 21일 거병했다.

다른 의병 대장과 마찬가지로 곽재우도 자신의 재산으로 무기를 마련하고

사노비 60여 명을 무장시킨 후 주민에게 호소하여 민병을 모집하고

인근 고을 수령의 관군까지 합세하여 4,000여 명까지 늘어났다.

 

곽재우에 이어 5월 8일 합천에서는 정인홍이 거병하였다.

인근의 성주지역의 관군과 의병까지 규합하여 약 3,000여명까지 늘었다.

고령에서는 김면이 지역주민 700여 명을 이끌고 거병하였다.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고령과 거창 등지에서 2,000여 명이 모였다.

진주에서는 허국주가, 함안군수 유숭인도 1,100기의 기병을 모았다.

임진왜란 조선의 대표적인 의병 홍의장군 곽재우

 

충청도에서는 조웅(선전관을 지냄)이 충주지역에서 500여명을 모았고

탄금대에서 패배한 군대가 합류하여 최대 5,000여명에 이르렀다.

5월 21일에는 전 보은현감 조헌이 옥천을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충청도 인근 지역인 공주, 온양, 정산, 홍주, 회덕, 보은에서 1,000여 명을 모집했고

공주출신 승려 영규도 승병 500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헌과, 영규는 청주 수복이후 금산성을 공격하다 전멸, 전사한다,.

금산전투는 1차 고경명, 2차 조헌에 의해 치뤄졌고 두전투에서 조선은 일본의 고바야카와군에게 패한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5월 6일 김천일이 1,000여 명을 모았고

충청도에 이르렀을때는 군세가 수천 명이 되었다.

6월에는 전 동래부사 고경명이 광주와 장흥 등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각 도에 격문을 보내에보네에 말을 수집했고, 제주목사 양대수에게 격문을 보네에 망를 수집했다.

군세가 약 6,000여면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조선백성은 임진왜란 소식을 접하자 마자

각 고을마다 지역의 수령 및 전 관료들을 중심으로 하여 군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일본군과의 효과적인 전투를 위해 대규모 군대 조식을 자발적으로 결성하였고

소규모 전투단위는 무관 출신들이 맡아 전투를 진행하였다.

특히 1592년 6월 평양성이 함락된 이후 국왕인 선조가 전국적으로 거병할 것을 호소하자

이들은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산하며, 일본군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한다.

좌측부터 차례대로 고경명, 김천일, 승려 영규

 

② 유격전으로 일본의 보급로를 위협한 의병

 

경상도는 일본군이 가장 먼저 점령한 지역으로 조선군의 조직화도 가장 빨랐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정암진 전투를 치른다.

당시 일본군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휘하 부대로 2,000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고바야카와는 일본군 참전 중에 가장 중진이며, 곽재우가 상대한

안코쿠지 예케이는 고바야카와의 가장 신뢰받는 승려이자 참모였다.

안코쿠지는 정찰대를 보내 나무 푯말을 설치하였으나, 곽재우는 이를 조작하여

늪지대로 유인하여,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이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한 첫 진군에서 패배하였다.

 

6월 6일에는 손입갑이 이끄는 조선군과 함께한 정인홍이

경상도를 장악하던 일본군 제7군 모리 테루모터의 일본군과 무계전투를 벌였다.

무계는 현재 고령군 성산면에 위치한 곳으로 부산에서 낙동강을 이용하여

상주까지 이어지는 일본군의 보급로의 중심부였다.

손입갑이 50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일본군 진영에 야습을 감행하여

일본군 진영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병력수가 절대적 열세라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손입갑은 낙동강과 황강이 합류하는 마진에서도 수송선단을 공격하고

일본군의 보급선박을 반복적으로 공격한다.

 

의병은 조선의 정규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규모의 회전을 벌이거나

일본군의 본영을 습격하여 일본군을 섬멸하는 규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의 의병들은 소규모로 조직하여 일본군의 보급로를 전략적으로 습격했다,

낙동강 동쪽 현풍, 창녕, 영산성 등 일본군은 보급을 위해 낙동강 주변에 주둔했는데

낙동 강변에 있는 곽재우, 정인홍, 감면 등의 군대가 낙동강 수로를 중심으로 매복하며

일본군의 낙동강 보급로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전방에 진출한 일본군의 보급망에 타격을 입히게 된다.

수로를 통한 보급로가 이순신장군에 의해 막혔다면

육로를 통한 보급로는 조선의 의병들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일본의 기습적인 공격에 조선의 관군은 급격하게 무너졌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늘 그래왔듯이 그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침략자에 대응했다.

항상 병력적 우위를 점하고 공격한 것도 아니고, 때로는 공격 시 전멸할 것을 알고고

고경명, 조헌, 영규와 같이 일본군에 돌격하여 목숨을 잃은 장군도 많았다.

또한 이름도 없이 사라진 많은 의병들도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이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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