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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한국사

역사이야기_임진왜란_진주성전투 이후 조선의 공세

by 넥벤져스1984 202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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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진주목사 김시민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진주목사 김시민은 1554년 충청도 목천현(천안)에서 태어나

1578년 24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3년 이탕개의 난에서 출정 토벌하였으며, 그 공으로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김시민은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시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함에 따라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김시민은 진주목사로서 지리산으로 피난 갔던 군대와 성민을 안심시켜

진주성을 보수하고 군사체계를 갖추며, 각종 무기를 준비하였다.

김시민 장군과 제 1차 진주성싸움

 

김시민은 진주에만 머무르지 않고 경상좌도의 지역을 대상으로 출병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진행한다.

5월에는 사천을 점령하고, 진주를 침범하려 하는 일본군을 격퇴하였고

6월에서 7월까지 고성에 있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사천, 고성, 김해 지역을 회복하였다. 이 공으로 종 5품에서 정 3품 진주목사로 승진한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전쟁 발발 후 진주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경상좌도에서 활약하며

진주 판관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전투 준비를 철저히 한 것으로 보인다.

 

② 제1차 진주성 전투

진주성도와 진주성문

 

일본군은 1592년 10월 6일 진주성을 공격한다.

진주성을 공격한 이유는 명백한데. 당시 일본군 경상도 점령지역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언양 김해, 문경, 성주, 상주 등 경상 좌도이다.

경상 우도로 여러 번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고,

일본군은 부산에서 창원, 고성 지역으로 점령지를 넓혀가다가, 유승민과 김시민을 비롯한

조선의 관군의 반격을 받고 패퇴하여 물러 난다.

 

이로인하 낙동강 수로를 통한 보급고라 조선의병에게 번번이 점령당함으로

부산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보급로가 차단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경상우도의 중심부인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 관군의 주력을 제압하여

경상도 전체를 점령하려 함과 동시에 일본군의 보급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려고 했다.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위해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다.

일본군 한국의 사료에 따르면 적게는 13,000명 많게는 30,0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면 조선군의 숫자는 김시민의 전주성 주둔군 3,700명과 이광악 곤양군수의 100명으로 편성했다.

3,000명 이상의 경상우도 및 전라도 의병이 진주성을 돕기 위해 출전했으나,

김시민은 이들을 내부로 미리 부르지 않았다.

 

진주성은 성 남쪽이 험준한 절벽 아래 남강이 흐르고, 서쪽은 절벽이며

북쪽은 3개의 인공해자로 형성되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김시민은 진주목사로 부임하고 피난민을 귀향시키고, 성채를 보수, 군수를 훈련시켰다.

특히 진주성 전투에서 500기의 기마병으로 조선관군의 위용을 보였는데

김시민이 전투준비를 정말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김시민은 현자총통 170여 대와, 비격진천뢰, 염초를 만들어 수성전을 준비했다.

천자총통과 비격진천뢰

 

③ 제1차 진주성 전투 전개

 

제1차 진주성 전투는 10월 4일부터 10일까지 약 7일 동안 전투가 진행되었다.

당시까지 모든 전투에서 철저하게 준비한 끝에 승리를 거듭한 일본군은

처음으로 전투 준비를 완료한 조선 관군을 진주성에서 만났다.

 

1차 탐색전은 일본군이 기마병 1000명을 동원하여 성주 위를 돌며 위세를 과시했다.

하지만 김시민은 대응하지 않았고, 노약자까지 남자복장을 해서 일본군에 조선군의 위세를 과시했다.

 

10월 6일 일본군은 적극적인 공세를 위해 3개 부대로 공격한다.

또한 조총수 1000명이 성 밖 민가의 문짝과 판자를 가지고 나와 판자뒤에서 사격했다.

김시민은 일절 반응하지 않고 탄과 화살을 아끼도록 하였다,

또한 성밖에서 기마군 500기로 무력시위를 벌이며, 일본군을 위협했다.

 

10월 7일 일본군은 총과 활을 쏘며 공격하며 심리전을 유도하였으나,

김시민은 대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10월 8일 일본군은 해자를 매웠고, 대나무 가건물에 바퀴를 달아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사다리를 통해 성벽에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그동안 사용하지 않던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총통, 진천뢰를 사용하고

돌을 굴리며, 화약을 짚더미에 싸서 불을 붙여 던지며 대응했다.

일본군은 사장자가 많이 발생하지 퇴각하였다.

 

10월 9일 전날과 같은 공격을 반복한다.

김성일의 응원 요청을 받고 달려온 전라도 의병장 최경희와 임계경의 군사 2000명이 후면을 압박했다.

 

10월 10일에는 일본군을 퇴각하는 척하며 진주성을 공격한다.

진주성군은 노인과 여자들까지 참전하여 방어하였다.

그리고 이 공격을 마지막으로 일본군은 물러 난다.

하지만 마지막날 김시민장군은 이마에 총상을 입고 전사한다.

 

④ 진주성 전투 이후 일본군

 

5일 동안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1/3 정도의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성 전투는 일본군의 전략에 막대한 차질을 빚게 하고,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보급로도 실질적으로 운영이 어렵게 되었다.

이런 보급로의 차단으로 한양 이북에서 일본군의 전투력에 차질을 빚게 했고

일본군의 전투 상황의 틀을 바꾸는 전략적 전투의 승리였다.

 

1592년 10월부터 1593년 6월까지 일본군이 처한 상황은

첫째, 조선군이 조선의 전 지역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며, 점령지를 수복했고

둘째, 조선군에 의해 일본군의 보급로가 끊겼다.

셋째, 일본군의 무기와 식량의 보급품이 바닥났다,

넷째, 한양석 이북의 일본군은 한양성으로 퇴각하였으며, 이어서 부산지역으로 후퇴한다.

다섯째, 일본군은 조선 전 지역에 대한 점령이 실패하고, 남부지역만 점령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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