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후반 수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경쟁은
피할 수 없었고 두 나라는 각자의 방식으로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고구려가 먼저 요서 지역을 침략했고,
영양왕의 친정의 침략을 받은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치르기로 한다.
① 수나라의 1차 침공 (598년)
수나라 황제 문제는 다섯째 아들 양량과, 양세적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3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한다.
1차 수나라의 침략은 30만의 원정을 기록하고 있으나,
전투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중국의 일부기록에서는 원정군의 처참함을 기록한 것들이 있는데
양량이 통솔하는 육군은 요동을 지나 진격하던 중 홍수를 만나 보급이 끊기고
군사들이 굶주리다가 비전투 손실로 엄청난 손실을 야기한 채 후퇴했다고 한다.
당시 기록상 30만이 맞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거니와, 사상자가 얼마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하지만 수나라의 1차 침략은 고구려군과의 경쟁보다는
자연재해, 보급준비 부족 등으로 인한 내용으로 인한 피해였다.
수나라는 대군을 동원하였지만 대군을 어떻게 운영할지, 어떻게 보급지원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없이, 수적인 우세로만 밀어붙이면 된다 판단한 것 같다.
꽤 많은 피해를 입은 수나라에서는 다시 고구려 정벌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으나
고구려의 전력이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유현 등의 반대세력에 의해 저지되었다.
물론 이 당시만 해도 돌궐을 정말 복속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수나라는 602년 베트남 지역을 정벌하고, 돌궐을 603년 제압하였으며
604년 수 문제가 사망하고 그의 태자 수 양제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② 7세기 초 한반도 정세
고구려가 북방에 국력을 집중하는 사이 한강유역을 둘러싼 한반도의 세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다시 경쟁을 시작한다.
물론 당시 기준으로는 고구려가 가장 강력한 국가이긴 하지만
고구려도 백제, 신라 한반도 세력을 제압하기에는 북방의 안정이 없었다.
603년 고구려는 신라의 북한산성(야차산성)을 공격하였고
607년에는 백제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였다.
수나라와의 경쟁 이전에 한강유역의 세력을 정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러한 고구려의 압박으로 인하여 백제와, 신라는 수나라와 교섭한다.
607 ~ 611년 사이에 백제와 신라는 수나라에 청병 사절은 보내고
612년 수나라의 원정으로 이뤄지면서 고구려는 남방지역에 공세를 취할 수 없었고
남방지역에서는 백제와 신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진행된다.
③ 수 양제의 대외적 정복 활동
수 양제의 즉위 과정에서의 정통성 논라은 추후 언급하기로 하고
수 양제는 즉위 이후에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고자 한 것 같다.
일본의 히데요시도 그러했듯이 대외원정은 자국 내 세력을 규합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불안정한 권력기반을 강화하고자 한 것으로 추정된다.
양제는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 황제의 군사지휘권을 강화했다.
또한 대규모 군대 동원과 친정이라는 방식으로 실행하였다.
이는 607년 군사 50만을 거느리고 북방 돌궐을 순행한 것이었다.
609년에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욕혼(토번) 현 티베트지역에 정벌을 나선다.
해당 정벌을 통하여 양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친정을 진행함을 통해서 황제의 권위를 높이고
군 통수권자로서의 위상을 확인시켜 주었으며,
향후 진행될 고구려에 대한 침략은 그 연장선이었다.
양제는 즉위 이전에 독고황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항상 황제권위에 대한
정통성에 집착한 것은 분명해 보이는 부분이다.
초기 수나라의 문제 시절에는 고구려와 전쟁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돌궐을 정복하고, 토번을 복속시키고, 베트남까지 정벌한 수나라의 양제는
다시 수나라의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자 하여
고구려에 대한 정복에 대한 준비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다.
④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 (612년)
수 양제는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한 예비명령을 610년에 내린다.
탁군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전국에 징집령을 내렸으며
300여 척 이상의 전선을 건조하는 등 병력을 징발하는 한편
보급의 중요성을 깨달은 1차 침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군량미도 징집한다.
마침내 612년 탁군에 113만 명이라는 병사가 집결한다.
물론 100만 명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일부는 동조하기도 하고 일부는 허왕된 기록이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100만이라는 군대가 조직화되기에는 당시 보급기술이 따라주지 못했다.
이후에 100만의 군대가 등장하는 것도 1900년대의 1차 세계대전이라
무려 1200년이라는 시간의 장벽이 존재한다.
612년 정월 양제는 고구려 원정군에 춘절 명령을 내린다.
군사가 100만 명이라 행군 길이만 해도 엄청나기 때문에
한꺼번에 출정하지 못하고 좌익 12군, 우익 12군 총 24군으로 나눠서 진군했으며
매일 1군씩 진군하여 24군이 출정하는데만 24일이 소요된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의문이 발생하는 점이 100만 명에 대한 보급지원계획이다.
보급장교로 근무하던 시절에 2000명이 먹는 식단만 제공하는데도 상당히 애를 먹었다.
현대전에서도 2000명이 본 취사시설이 아닌 야전 취사를 할 경우에 굉장히 어렵다.
100만 명을 먹이기 위해 단순 쌀로만 계산할 경우에도
1일 3식 (쌀 600g) 기타 부수적 찬 없음.
0.6kg * 1,000,000명 * 30일 = 18,000톤 / 18톤이 아니라 18,000톤이다.
하루 소비에만 600톤이 소비가 되는데 해당 병참지원이 가능한 수준인지 의문이 든다.
현대적인 트럭 5톤 트럭으로도 120대가 소요되는데
마차로 수송하는 경우에 해당 수송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이다.
물론 몽골군처럼 본인의 식량을 전투에 편성되어 있는 사람이 휴대할 수도 있지만
개인당 30일 치의 식량만 휴대하더라도 18kg 수준이 된다.
행군을 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또한 쌀 20kg 들어보면 알 수 있지만
이 무게를 휴대하고 몇백 Km를 행군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거두절미하고 수나라는 612년 100만이 넘는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했다.
여기에는 진짜로 고구려와의 전쟁을 하려고 했다기보다는
고구려에 수나라의 숫적 우위를 과시함을 통해 고구려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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