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임진왜란은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부정적인 전쟁으로
많이 인식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임진왜란에 참가한 조선군의 장수에 대해서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 학계에서 많은 연구를 통해 일등공신으로 책봉된 인물 외에도
많은 인물들에 대해서 탐구하고 있고, 임진왜란에 대한 원인론에 대해서도
한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된다.
이러한 내용은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민족사학'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 임진왜란이 시작된 배경에 대한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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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_임진왜란이 시작된 배경 ① (풍신수길, 선조 / 조선, 일본 국력비교)
임진왜란은 1592년 조선이 건국된 지 약 200년 뒤에 시작된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에서의 당시 동아시아에 상황에 대한 평가는 조선과 명에는 박하고일본에는 굉장히 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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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임진왜란 원인론 한국학계
임진왜란 원인론에서 한국학계는 가장 먼저
히데요시의 야욕을 꼽는다. 도요토미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를 통일하고
1. 이욕과 공명심에 끌려서 조선과 명을 침략했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많다.
2.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신흥세력을 믿고 지나친 망상을 일으켜 조선과 명을 침략했다고 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노부나가 사후 자신의 가신단에게
봉지를 나눠주기에 일본의 영토에서 부족함을 느꼈고
부하들에게 영지를 나눠주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를 침략해서
새로운 영토를 얻어야 했는데 이런 생각에 기인하여 조선을 침략했다고 본다.
3,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 이후 무신들이 방치되면 내란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무신들의 힘을 외부로 방출히가 위해서 침략을 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위의 경위를 보면 기본적으로 공명심론, 감합무역설, 정복욕설, 영토확장설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추가된 견해가, 당시 조선과 명의 허점을 알게 된 히데요시가
조선의 무능과 실천의 미약성, 사대사상과, 타력(명나라) 의존성, 국방정책의 빈곤을 확인하고
조선을 침략해 볼만하다고 여겼다는 의견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명나라, 조선은 왜구의 침략에도 곤란을 겪으며
명나라 동쪽, 조선의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일어나고 있으나, 이를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조선을 침략하고, 명나라로 진출하는 게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② 임진왜란 원인론 일본학계
히데요시가 오다노부나가의 가신일 때 주코쿠(모리가) 정벌을 지시하며,
해당 영지 정벌 시 해당 영지를 하사하겠다고 하자, 히에요시는 이때부터
해외 영지를 토벌하고자 했다고 하는 영웅주의 역사관, 해외 진출 지향성을
근거로 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다른 견해는 조선이 일본의 감합무역 중재요청을 거절하여
명과의 감합무역을 실행하기 위해 전쟁을 저질렀다는 견해가 있다.
이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의 원인이 조선에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이는 히데요시가 조선에 감합 무역을 의뢰한 직접적 증거가 없다.
다른 견해로는 쓰루마쓰 사망에 따른 울분 해소설
국내 무력 해외 소진설, 조선의 일본 명입공 거절설, 일본의 입공 탐병설이 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목적을 조선침략이 아닌 명 정벌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고,
조선은 명을 침략하기 위한 발판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가장 유력한 설로는 국내의 무력세력을 소진하고, 자신의 가신단인
신흥세력에 대한 영지 부여, 그리고 천하인이 되기 위한 대륙진출이다.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일본이 천하의 중심이다라는 사고가 있었던 것 같다.
③ 맺음말
한국학계는 임진왜란 원인에 대한 언급은 많아도,
그 원인에 관한 집중적인 연구는 대단히 빈약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당한 국가이기 때문에
해당 원인에 대한 정확한 사료가 없는 편이다.
당시에도 동서인의 분열로 인해서, 정확한 판세를 보는 이도 많지 않았고
전쟁의 발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대대적인 침략전쟁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국학계의 견해는 일본학계의 연구를 수용하면서, 도요토미 정권의 내부 모순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과, 토요토미 개인의 성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뉜다.
일본학계는 패전 이전에는 히데요시의 영웅관에 입각해 있다. (공명심, 정복욕, 쓰루마쓰 사망설)
하지만 이런 견해들의 최종목표는 명 정복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이러한 점은 조선이 일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아 조선을 침입했다는
조선에게 전쟁의 책임을 부여하는 견해가 깔려 있다.
하지만 패전 이후에는 히데요시 정권이 모순 특질에서 원인을 찾는다.
히데요시의 정권을 불안정성 (취약한 군사력)
당시 관동지방의 다이묘들은 참가하지 않는다. (도쿠가와가문)
히데 요시의 권력은 영지와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다이묘들을 통제할 제도의 부재라는 상황에서 권력유지를 위해
대내, 대외적으로 긴장관계가 필요했고 이로 말미암아 조선을 침략했다는 견해이다.
16세기 동아시아 판세의 전환점이 된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을 더 갖고 연구해야,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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