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의 교섭이 실패함에 따라
1590년 11월 시점에서 전쟁은 필연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3월 13일 약 16만 명의 군세를 9개 부대로 편성하여 조선으로 출병했다.
그중 선봉대인 1대는 고니시 유니키가(소서행장)은 4월 13일 부산으로 향한다.
① 임진왜란 일본 정벌 군 (제 1대)
* 총 병력수 : 18,700명 / 362,00석(추정)
* 고니시 유키나가 / 7,000명 / 하고 / 200,000석(추정)
* 소 요시토시 / 5,000명 / 쓰시마 / 20,000석(추정)
* 마쓰우라 시게노부 / 3,000명 / 히젠 / 63,000석 (추정)
* 아미라 하루노부 / 2,000명 / 히젠 / 40,000석 (추정)
* 오무라 요시아키 / 1,000명 / 히젠 / 25,000석 (추정)
* 고토 스미하루 / 700명 / 고토 / 14,000석 (추정)



보통 일본 전국시대 석고 기준으로는 1만 석 당 병력 250명으로 계산한다.
임진왜란 1군의 선봉대장 급인 소서행장 (고니시 유키나가)은 영지보다 많은 병력을 이끌었다.
1군에 소속된 대부분의 영주가 본인이 가진 영지보다 많은 병력을 편성했다.




일본군 제1대는 히젠, 하고 지역의 영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을 진행한 후 본인의 가신들을 해당 영지에 배정한 것으로 보인다.
히고지역의 경우 시마즈 가문이 통치하였으나, 규슈 정벌 이후 해당 영지를 빼앗기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에게 하사된 지역으로, 통치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영지였다.
게임을 통한 수치화로 표현하기는 좀 애매하지만.
1군에 소속된 부대 중에서 맹장급 지휘관은 없고,
정치와, 상재 등으로 편성된 부대였고, 코니시는 지속 헤서 소 요시토시와
조선 출병에 대해서 반대하며, 화친을 주장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출병군 편성 대부분이 영지 10만 석 이상의 영주에 지역 다이묘를 구성했는데
히젠, 하고 지역은 대부분 왜구 활동과 사쓰마 지역의 시마즈 가문과
몇십 년간 대립한 무력집단이 거주했던 곳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다.


* 해당 기록은 음력기준
제1대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쓰시마 번주 소 요시토시와 함께
4월 13일 출병하여, 14일 부산, 15일 동래, 19일 밀양을 점령한다.
이후 25일 상주, 26일 문경을 점령한 후 조령을 넘어 28일 충주에 이른다.
(행군로 - 부산 - 밀양 - 대구 - 선산)
부산진성, 동래성 전투에서 조선군은 분전했지만 일본군의 대대적인 침략에 맞설 수 없었고,
도순변사 신립의 8,000 병력과 탄금대에서 조우하여 전투다운 전투를 처음 치른다.
물론 신립이 왜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없느냐.
조령으로 이동시 순변사 이 일이 문경에서 패퇴하고 조령이 이미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는
오보를 듣고 27일 충주성을 나와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고 알려져 있다.
고시니 유키나가는 맹장은 아니지만, 일본군은 조선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다.
이후 고니시 군은 4월 30일 여주로 진출, 5월 2일에는 북한강을 건너 한성으로 향한다.
한성 입성까지 13일 출병 이후 약 20일 만에 도착하게 된 것으로
서울 부산 거리를 400km로 계산할 때 하루에 20km 전진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굉장한 전격전이었다. 하루 20km 행군조차 힘든데 별도 보급부대 없이
군사들이 본인의 보급품을 휴대하고 전투를 치르며, 행군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속도였다.
고니시에게 주어진 영지는 평안도 지역이었는데
본인의 영지가 일본에서 25만 석이었는데 평안도의 당시 기준 석고수는 179.4만 석으로
해당 영지를 부여받을 경우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강자가 되는 수준이었다.
이후 개성은 5월 29일 함락, 평양은 6월 15일 함락하고 평양에서 대기하는데
해당 과정 중에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고, 조선군 스스로 궤멸했다.
평양성 점령 이후 일본군도 너무 빠른 진격으로 말미암아
평양 이남 지역의 병력배치와 전선의 점검을 진행했는데
이때부터 조선 후방에서 의병들의 반격이 있어 더 진군할 수 없었다.
이후 명의 심유경과의 휴전협상 등으로 인하여 진군을 지속하지 않았지만
고니시 군은 더 북진하기에는 후방에서의 보급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조선의 기후 환경이 변화하는 시기로 접어듬에 따라 더 진격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임진왜란의 선봉부대인 고니시 군은
일본 전국 다이묘의 구성을 볼 때 전투력이 강력한 부대는 아니었다.
당시 일본도 서쪽 다이묘들은 대부분 도요토미에게 복속되었으나,
동쪽 다이묘들의 군세는 아직 정벌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일본군에게도 조선군은 무참히 찢겼다.
당시 조선이 얼마나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지를 확인하는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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