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선봉장 1, 2군을 선봉대로 나선 이후 통상적으로 3군까지는 선봉대로 보고 있다.
3군은 부산에 상륙해, 김해 창원 창녕, 성주 금산 영동 청주로 향했고
5월 7일 한성에 도달한다. 또한 황해도지역 (73만 석으로 평가) 담당을 맡았고
조선왕인 선조를 쫓아 개성공략에도 참가했다.
① 임진왜란 일본 정벌 군 (제3대)
* 총 병력수 : 11,000명
* 구로나 나가마사 5,000명 / 부젠 / 125,000석(추정)
* 오토모 요시무네 6,000명 / 분고, 부젠 / 370,000석(추정)
평양성 점령 이후에는 황해도 지역 정벌에 힘썼으며,
7월 7일에는 황해도 해주를 공략했다.
평화협정 이후에는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고, 진주성 싸움(2차)에 합류한다.
먼저 구로나 나가마사의 경우에는 히데요시의 책사 구로다 요 시타가의 적자로
히데요시의 주코쿠 정벌 시, 모리가와 화친하고, 아케치 미쓰히데를 정벌하고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치하게 되는데 가장 기여한 무장이다.
그의 적자인 구로다 나가마사를 3군 대장으로 조선 출병을 진행했다.
구로나 요시타카(간베에)의 경우 제8대 우키타 히데이에의 참모로 출병하나,
히데요시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태업인지, 조선출병에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인지
두 번 이상 본국으로 귀환한다.
구로다 가문은 규슈를 정벌하기 위해 히데요시가
규슈에 영지를 배치하여, 시마즈가문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시마즈가문 정벌 이후 부젠지역에 영지를 배정하였다.
히데요시의 측근 가신들은 신규 영지가 규슈지역이기 때문에
대부분 규슈지역에 영지를 하시 받고 15 ~ 25만 석 영지를 부여받았는데
히데요시가 구로다를 견제했다기보다는 부젠지역이 히젠지역보다
산간지역이라, 영지의 석고수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토모 가분은 대대로 부젠지역을 통치했던 가문으로
규슈의 3대 세력인 시마즈, 류조지, 오토모 가문중 하나였다.
오우치 가문을 몰아내고, 부젠, 분고 지역을 통치하였으나,
비상하는 세력인 사쓰마의 시마즈 세력을 막아내지 못했고,
오다 노부나가의 모리가문 주코쿠 정벌 시 후방지원을 약속하나
혼노지의 변에 따라 상황이 급변하고, 다시금 히데요시에게 붙는다.
하지만 류조지, 시마즈 가문에 에 연달에 패하며, 세력이 크게 쇠퇴하고,
그의 아들인 요시무네는 감독을 상속한 이후, 조선에 출병까지 진행하나,
오토모 가문은 전투에 특화된 가문은 아니었어서, 크게 활약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요시무네의 대에서 오토모 가문은 다이묘로서의 역할을 잃는다.
오토모가문에는 타치바나 도세스, 타카하시 쇼운 등의 명장이 있었으나.
1585, 1586년 각각 사망하면, 금세 기울었고
조선출병을 진행할 때 오토모가문은 사실상 히데요시에 의해
분고, 부젠의 영지를 보장받는, 시마즈 정벌에 대한 협력으로 인함
약소세력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지수가 더 많음에도 구로다 나가마사가 3군 대장이었고
영지 수에 비해서 병력도 많이 참가하지 않았고, 실제 전투에서 활약도 못했다.
실제로 오토모 요시무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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