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가 시작되기 전 동아시아에는
중국은 명나라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한반도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변경되고 있었다.
당시의 명나라는 흑사병으로 인구를 회복하지 못한 유럽의 전 지역보다
인구가 더 많은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였다.
명나라는 육상뿐 아니라 해상에서도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조공체계를 확립하는데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초대형 규모의 해상 원정이었다.
① 정화의 원정
정화는 명나라의 남방원정에서 점령된 윈낭성 지역의 색목인으로(회족)
이슬람을 믿으나, 중국에 합병된 민족의 사람이었다.
정화가 서쪽으로 해상을 통해 원정을 떠나는 데는 이슬람(색목인, 회족)이었기 때문에
인도를 포함한 중동지역까지 원정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화의 원정은 1405년에 시작하여 1433년에 그가 죽음을 맞이하여 종료된다.
해당 기간 동안 총 7차례 원정을 떠나며, 6차까지는 영락제 시대에
7차에는 그의 손자인 선덕제 시대에 수행했다.
정화의 원정은 소주에서 시작하여, 말라카해협을 지나 인도양, 중동 아리비아반도
동아프리카 까지 진행하였으며, 이슬람이었던 정화는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까지 도착한다.
각 항해에는 약 20개월에서 24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정화의 함대는 당시 유럽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대단한 규모였다.
정화의 함대는 62척의 대형(전투) 선박을 포함하여 보급선단까지 약 200척
병력규모는 27,000명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명나라의 인구가 1억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큰 항해 선단을 구성하는 것은 당시시대에는 명나라만이 가능했다.
정화의 함대는 교역보다는 서쪽으로 향하며, 조공을 받기 위한 선박이라서
함선의 크기가 보다 크게 건조되었으며 기록에 따르면
길이 151미터, 너비 62미터로 추정된다. 하지만 해당 선박의 크기가
당시 유럽의 선박이 20 ~ 30m 내외였고, 철갑선이 아닌 목선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확인은 필요해 보인다.
동아시아에서는 실크로드를 포함하여, 몽골시대에 서양까지 진출했기 때문에
바다로 진출함에 있어서 서양보다 더 두려움 없이 진행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서양은 막연하게 인도를 향하는 항해였던 반면,
명나라의 대함대는 인도까지는 당연히 역사적 교역을 통해 알고 있었고
멀리 중동까지는 인지했으나,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서는 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27,000여 명이 항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식량과 식수가 필요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당 인원이 식량과 식수를 보급하기 위해서는 70톤/일로 추정되는데
해당 항해시간이 20개월에 이르렀기 때문에 중간에 보급을 감안하더라도
선박당 적재량이 1,000 ~ 2,000톤 수준에 이르렀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발전할 때는 제한 없이 발전하지만
해당 군사적 기밀이나 비밀에 관련된 사항이 기록이 유실되면,
구현할 수 없는 것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아 해당 함선도 해금령 이후
중국에서도 기록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화의 1차 원정 이후 영락제는 선박을 1,000척 넘게 건조를 지시한다.
이후 정화는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바로 다음원정에 돌입한다.
하지만 정화의 서해항로 원정에 대한 목적은 불분명하긴 하다.
명제국은 타 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함선을 파견한 것은 아니며
경제적으로 유럽의 대항해시대처럼 향신료 무역을 위한 것과 같이
경제적은 제품을 찾기 위한 항해도 아니었다.
이미 중국에는 세계의 모든 교역품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유럽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중동, 인도, 동남아시아의 모든 교역이 가능한 곳이었다.
명나라가 아무리 강력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5척 내외의 항해를 보냄에도 왕의 사재를 털만큼
대규모에 원정은 명나라에도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그래서 6차 원정 이후 영락제 사망 이후,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 해금령의 정책을 펴기도 한다.
물론 정화의 함대가 군사적인 목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명나라 원정군은 동남아시아에서 해적들을 격파하였으며
교역을 방해한 모든 세력을 복속시켰고, 마자파힛, 스리랑카 등의 국가에
조공을 요구하며, 조선에 했던 방식과 동일하게 각 지역에서 영향력을 미쳤다.
정화는 7차 원정도중 병을 얻어 사망하며,
바다에서 근 30년의 보낸 세월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했다.
정화의 사망이후 명나라는 바다로 향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보아
정화의 영향력은 명에서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역사적으로 볼 때도 대양으로 이만큼 진출한 경우는 유례가 없다.
하지만 이 시기 이후 해금정책을 강력하게 펼치고, 유럽은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어
세계의 패권 중심이 중국에서 유럽으로 결국에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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