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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한국사

역사이야기_우리의 전성기는 왜 50년도 유지 하지 못했을까?

by 넥벤져스1984 2024.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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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건국된 조선의 최 전성기 영토(15세기)

 

태조 이성계의 건국 이후 태조 이방원, 세종대왕을 거친 조선은 15세기 세계에서 강한 국방력, 인구, 농업 생산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종의 4군 6진 개척 이후 조선은 영토를 추가로 확보하지 못하였다.

3면이 바다고 추가 진출 가능한 방향은 북쪽밖에 없었으나, 북쪽을 건너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거나 

백두산을 포함한 산을 넘어야 하는 지형적 문제점도 있었으나, 외부로 진출하기 위한 내부적 안정이 없었다.

 

조선 5대왕인 문종은 세종 대리청정 시간 포함 약 7년 동안 재위하였으나,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후계권을 갖추지 못한상태에서 단종이 즉위하게 되어, 국가의 안정이 지속 유지 되지 못하였다.

 

태종, 세종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국가 내외부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으나,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는 말도 있지만 갑작스러운 왕위 계승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다.

 

문종 단종이후 계유정난을 통해 등극한 세조는 호평과, 비평이 동시에 존재한다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마무리한 군주, 경국대전 편찬 등 여러 업적도 있으나,

필자는 세조 즉위 때문에 조선의 전성기는 거기서 끝났다고 생각한다.

 

영화 "관상" 중 일부

 

전성기가 끝난 원인은

 

1. 반정을 통한 정통성 상실

 

전혀 명분 없는 상태에서 반정을 통해 왕에 즉위함을 통해 

조선의 건국 기반인 유교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음을 통해 왕실 간의 다툼이 시작되었고,

왕실을 둘러싼 세력다툼을 초래하여, 내부적으로 안정을 갖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서 내부 견제를 지속하게 되고 조선은 외부로 힘을 쏟아낼수 없었다.

 

2. 집현전 폐지 

 

국왕의 자문기관인 집현전을 폐지함과 동시에 계유정난 공신들의 책봉을 통해

국가의 인재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길을 막았다.

집현전은 당시 학자들의 연구기관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나라가 발전하기 위한 모든 역량을 갖춘 인재들을 모으는 기관으로 해당기관은 폐지함을 통해 

추후 성리학에 대한 이론에만 연구에 몰두한 사림의 대두를 준비하게 하는 행위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무는 등한시되고 국방력은 약화 될 수밖에 없었다.

 

3. 국방력 약화

 

세조 본인 반정을 통해 즉위 하였기 때문에 찬탈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찬탈을 예비한다는 의미는 군을 양성할 수 없으며, 화포 무기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문종까지는 화학 무기의 발전에 힘썼으나, 세조는 해당세력의 반목할 경우를 늘 대비해야 했다.

또한 군편성 체제를 수정함을 통해 세종 문종을 통해 물려받은 경제력을

국방력 강화에 제대로 투자하지 못했으며, 이는 후대에 국방력이 약화되어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게 된다.

 

4. 권신의 세력화

 

이때부터 네 편과 내편만 존재하게 되었다.

내편이 하는 건 옳고 니편이 하는건 옳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세종은 반대 의견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 군주였지만 세조는 내편을 챙기는 군주였다.

이로 말미암아.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태조 태종 세종 문종을 통해 국가의 전성기를 갖추던 조선은

불과 1세기 만에 모든 강점을 상실하고, 센코쿠 시대를 통일한 일본에게, 만주를 통일한 여진족에게 국토의 대부분을 유린당한다.

당시 여진과 일본은 영토와 인구가 우리보다 많았지만,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1세기라는 시간 동안 그들을 정복했다면, 내실을 더 잘 다졌다면, 우리 조선은 한국은 이렇지 않았을 텐데..

 

세조의 반정이 정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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